짙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손열음과 커피 한 잔을

병원 로비에 울려 퍼지는 힘찬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황제’ 3악장, 공원을 가득 메운 장엄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악장, 마트를 축축하게 적시는 쇼팽의 자장가, 마사지 숍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2악장. 

‘왜 이런 장소에서 이런 뜬금없는 음악이?’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 한 장의 앨범으로 나왔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언더 더 선(Under the Sun)’이다. 

병원 로비에서는 환자들의 마음을 진정시켜줄 수 있는 음악이, 마트에서는 보다 활기찬 음악이 필요할 것이다. 손열음은 “마사지 숍에서 라흐마니노프를 듣고 있자니 릴렉스하기가 힘들었다”라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썼다.
 
이미 존재하는 명반들에서 알맞은 곡을 발췌해 공간에 맞는 음악을 큐레이팅하는 것이 첫 번째 아이디어. 하지만 이것은 음원에 대한 권리문제가 걸린다.
결국 손열음은 “그냥 내가 직접 녹음해서 만들어버릴까?”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 앨범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왔다. 도우미들도 있었다. 매장 내 배경음악을 고민하던 카페 테라로사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이 앨범은 ‘여름날의 카페’라는 공간을 위한 곡들로 채워졌다.
피아니스트 문재원이 손열음과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았다. 톤마이스터 최진 감독이 프로듀싱을 맡았고, 강현구 피아노제작 마이스터도 함께 했다. 녹음은 고양 아람누리홀에서 진행됐다.

무더운 여름날, 바다가 바라보이는 카페의 노천 테이블에 앉아 잔에 송글송글 차가운 방울이 맺힌 커피를 홀짝이며 듣는 듯한 ‘착청현상’을 일으키는 근사한 앨범이다. 

19개의 곡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됐다. 손열음의 설명을 들어보자.
“저와 재원씨가 완성한 선곡은 ‘한여름날의 하루’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어요. 일출을 그린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아침’ 다음, 생상 ‘동물의 사육제’ 속의 어둑어둑한 새벽숲 뻐꾸기, 아침을 깨우는 암탉 수탉이 그 뒤를 잇고, 상쾌한 아침을 떠올리는 풀랑과 그레인저의 음악들이 이어지고 나면 뙤약볕 쬐는 한낮을 묘사한 비발디의 ‘여름’을 지나 파야와 미요의 신나는 곡들. 이어 벤자민의 나른한 자메이칸 노래를 들으실 때쯤엔 서서히 해가 지는 것을 목격하시는 듯한 경험을 꼭 하셔야 할 텐데요.”

앨범의 마지막은 완전히 어두워진 여름밤을 표현한 ‘서머타임’으로 끝난다. 더 이상 완벽한 여름날의 하루라는 것이 존재할까 싶을 정도다. 

커피 잔 속의 얼음이 다 녹을 즈음, 여름날의 하루도 뉘엇뉘엇 저문다. 커피를 홀짝이는 동안 야외무대에서 손열음이 몇 시간이고 피아노를 쳐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가끔 눈도 마주쳐주면서.

가을이 되면, 가을에 어울리는 앨범도 내어주면 참 좋겠다. 낙엽이 쌓이는 국립공원 자연휴양림도 좋고, 가을 분위기가 물씬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도 괜찮을 것 같다. 삭막한 광화문까지 찾아와주면 더욱 고마울 것 같다. 
손열음씨, 분발해 주세요!

 

[출처]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